카테고리 보관물: 시즌 F

선생님 이제 그만 올게요, 다시 오지 않을게요.

반복해서 꾸는 꿈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나의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으로 돌아가는 꿈이다. 가정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었는데, 나는 자꾸 자꾸 성인이 된 모습으로 다시 그 집을 찾아가 피아노 강습권을 끊고는 ‘가야하는데, 다시 이어가야하는데’ 하면서 그 집 근처를 맴도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묘한 고독감과 연결되어 있어보이는, 엘레베이터 기다리기. 나는 엘레베이터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던 시간들이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피아노 학원에 가기 위해 엘레베이터를 기다린다.

내 어린시절 고향 8단지의 엘레베이터들은 자꾸 꿈에 등장해서는, 내가 가는 목적지를 복잡하게 만든다. 엘레베이터를 갈아타야 한다거나, 뭔가 어려운 절차에 따라 엘레베이터를 타야한다.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고, 도착해서 내가 들어갈 곳은 미스테리다.

몇주째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아이가 혼자 노는 것을 본다. 아이에게는 무수히 많은 기다림의 시간과 자기 혼자의 시간이 있다. 내 아이에게는 지금부터 그 시간들이 무한하게 늘어날것으로 보인다. 그 시간들 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그릴까?

나는 밤에 얕은잠을 자면서 낮에 이루지 못한 매듭을 짓고 다닌다. 어젯밤에는 어쩐지 그 자꾸 찾아가던 피아노 학원에 가서 선생님께 이제 피아노 강습을 이어가려고 자꾸 찾아오던 것을 멈추겠다고 말했다. 이건 아마도 내가 깊은 잠을 자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 의식이 하는 말인것 같다. 난 더 이상 어디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걸까? 정말 돌아가지 않으려는 걸까? 나에게 무엇이 생기려는 중인가.

차 내리기

아이의 방학이 끝나서, 오랜만에 차를 내려보았다.
미국에서 차를 자주 내려 마셨었나보다.
차를 내리는데 눈물이 왈칵 나려고 했다. 그리움을 느꼈다.
정갈하게 아침을 시작하기도 했었구나.
그때는 부엌이 분리된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부엌이 한 가운데에서 북적북적이다.
많은 삶의 부분들이 편리해졌지만, 나의 영역이 부족한 느낌이다.
노트북도 너무 오랜만에 꺼냈고,
지갑에는 정리해야할 영수증들이 가득.
빨래도 이빨래 저빨래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로 오랜만에 내 시간! 이 시간이 자꾸 자꾸 또 와야 할텐데.

그동안 수고했다고

오랜만에 옛집에서 이사하는 꿈을 꾸었다. 12월에는 자주 꾸던 꿈이었다. 그러고 돌아보니 정말 집을 잘 꾸려내었다. 내 새로운 꿈들도 꿈틀꿈틀한다.

미국에서의 삶이 버텨내는 삶이었다면, 여기에서의 삶은 살아내는 삶인것 같다. 살아내려니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두려움이 앞서기 전에,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낑낑끙끙.

짜증내고, 울고, 무너질테지만. 그마저도 조금 더 당연하게 받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 어제의 봄비는 움츠러들뻔했지만, 매섭지 않은, 봄을 더 당겨줄 다정한 비였다. 일상에 집중하며 더 힘을 내보겠다!

할머니 가시는 길

내가 힘이 들고 지쳐서 메말라 가고 있을 때,
영상 통화로 나와 연결된 할머니는 세상 내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나에게 뽀뽀를 마구 해주셨다. 그때 나락으로 가던 나의 마음은, ‘그래 나는 그냥 마땅히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건져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마당에서 구름 가는 것만 바라보고 계신다던 할머니는
구름이 되어서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나는 그때 하늘도 구름도 나무도 많이 보이는 놀이터에서 아이를 놀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짐을 싸고, 짐을 풀고.
집집마다 떠돌고, 집을 얻고.
그러는 동안 할머니를 다시 찾아가는 일은 늦혀져갔다.
때때로 어느 밤에 할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개학, 3월, 새시작의 시간들을 앞두고서
비가 내리는 할머니의 집으로 향한다.
땅 속에 할머니가 계시다는 투박한 설명으로 허무하게 인사가 끝났다.
그래도 생각보다 실감이 안나서,
그냥 너무나도 익숙하고, 할머니와 동일한 의미인 할머니의 집 마당에 앉아서 위로를 받았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은 아마 또 어딘가 내 안에 맺혔다가
어느 취약해진 밤에 끌어 올려지리라.

세상에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고,
떠나지 않는 사람도 없고,
떠나서 가는 곳은 알 길이 없고.
다만 아직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가 남아있는것 같다.